가시
필자의 부모님께서는 경남 합천 묘산면 산제리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밤 농사를 하십니다. 고향에 가게 될 때면 부모님을 도와 밤을 줍고는 했는데, 밤을 줍다 보면 어느새 밤 가시에 발박닥을 찔리기 일쑤입니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가늘고 작은 가시에 발바닥을 찔리기라도 하면 마음대로 걸을 수도 뛸 수도 없습니다. 그 가늘고 작은 가시가 필자의 삶을 통제해 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가시에 찔린 채 평생을 살아가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울을 찌른 가시는 바울을 평생 괴롭히던 고통스러운 질병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질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질병의 고통에 대해서는 ‘육체의 가시’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질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세번 기도를 하지만, 바울이 받은 기도의 응답은 그 가시를 심으신 이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종 바울의 육체에 가시를 심어 놓았을까요?
바울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사도들 중 유일하게 삼층천이라 불렸는 낙원으로 올라가 예수님께 직통 계시를 받은 사도입니다. 바울은 영적인 정상에 올랐던 것입니다. 산 정상 절벽 꼭대기의 자리에는 강풍이 몰아 칩니다. 거기엔 강풍을 막아줄 나무도, 바위도 없습니다. 홀로 강풍을 견뎌내야 합니다. 가파른 절벽 꼭대기에서 강풍에 밀려 추락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상 스스로를 낮출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낮아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몸을 낮추어 바울이 추락하지 않도록 바울의 몸에 가시를 심으셨습니다.
한국에서 불어오는 미투 열풍은 정상에 오른 자들이 어떻게 단 한 번에 추락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문화계, 종교계, 정치계, 예술계의 정상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던 그들의 추악한 민낯이 세상에 낱낱이 드러나자 어떤이는 견디지 못해 스스로 높은 절벽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고, 어떤이는 추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도 사람들의 손에 밀려 억지로 끌려 내려 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가시를 심으십니다. 사람에 따라 물질의 가시, 건강의 가시, 관계의 가시로 다른 모양으로 심어지지만 고통은 같습니다. 그 가시 때문에 삶의 속도가 나지 않고 나를 뽐낼 수도 없으며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 가시를 빼내려고 몸부림치고 새벽기도, 금요 철야에 예배당에 나가 부르짖어도 좀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때문에 몸을 낮추게 됩니다. 그 가시 때문에 인생의 강풍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가시를 빼 달라고 기도했을 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은, ‘너의 가시 때문에 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높입니다. 바울을 성자라 치켜세웁니다. 물론 바울에게는 존경할 부분도 배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주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들 앞에서 옷을 찢습니다. 자신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자들에게 자신이 자랑할 것은 가시밖에 없다고 외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바울의 육체에 심겨진 가시로 인해 경험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에게 가시가 없었더라면 세계 선교의 기초를 놓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자기가 한 줄 착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떠납니다. 모든 것을 소유했던 에덴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 숨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원했던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그 아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받은 후에 아버지를 떠나 버립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강풍에 밀려 추락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시기 위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육체에 가시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손해도 목사